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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홈페이지

[수필] 고시원살기

suritam92012.12.17 04:58조회 수 1124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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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시원 생활은 2012년 2월에 시작되었다. 충무로에서 친구와 같이 살던 계약기간이 끝나고, 인천에서 신촌 쪽으로 출근하는 때였다. 구글에서 '고시원'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고시원넷'이라는 사이트가 나오는데, 지역별, 지하철 역별로 종류별, 가격별 고시원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고시원, 고시텔, 원룸텔 등의 다양한 종류의 숙박업소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 30~40만원 대라고 생각한 평균 가격 말고, 15만원, 50만원 등 최저, 최고가의 1인 생활 가능 공간 제공 업소들까지 나와 최저가를 찾기로 했다. 신촌 근처로 알아볼까도 했으나, 대학교에서 가까우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숭실대입구에서 가까운 서울대입구 부근의 고시원을 찾았다. 한달에 17만원. 밥과 김치는 제공되고, 교통편도 나쁜 것 같지 않아, 실(室)이 있는지 전화 확인 후, 방문하였다. 처음 방문하는 고시원. 어둑어둑한 조명에 매우 좁은 복도로 늘어서 있는 수 많은 방들. 학교 앞의 선배가 살던, 대학원 후배가 살던 고시원을 본 적이 있어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내가 살 거라고 생각하니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고시원 생활을 결심한 나로서는 싼 값과 공동시설(화장실 등)의 청소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현금을 지불하고 세탁, 식사, 빨래 건조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1.8평 방의 문을 닫았다. 얼마 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시원 총무는 이동할 때,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다니라는 말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왜 그 말에 눈물이 핑돌 정도로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첫번째 고시원 총무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성격 좀 있는 사람이라 억압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텔레비전은 보지 않기 때문에 책상위에서 치워달라고 하여 이동시켰고, 맥북에 USB to Lan 케이블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했다. 음, 그랬던 거 같다. 벌써 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시원으로 가는 길의 할인 마트를 잘 봐두었는데, GS마트가 규모도 크고 괜찮은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카레와 짜장을 대량으로 사서 밥하고 김치로 끼니를 가끔 때웠는데, 그 이후로 카레를 싫어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카레를 좋아하지 않는데, 완전 증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유감이다. 짜장은 아직도 먹는데, 어려서 그런지 질리지 않는다.(어떤 영화에서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하는 기준을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나눈 적이 있다.) 카레와 짜장을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야 했는데, 곤혹을 치르며, 1주에 한 번 정도만 먹는 걸로 하고, 아예 밥을 거르기 까지 하였다. 다행이 그 때, 참치를 발견했던 것 같다. 참치와 밥을 비벼 먹으면 그런데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추참치를 먹으면 김치를 안 먹어도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빨래를 하여 방안에 너는 일, 밥먹고 설거지 하기 등은 큰 문제 없이 해결하였으며, 화장실 사용도 출근 시간에 타이밍을 놓치거하 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
서울대입구 근처에 전 직장 상사의 집이 있어, 그 분의 권유에 의해 낙성대 근처의 관악구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에 등록하였다. 월, 수, 금 새벽 6시부터 6시 50분까지 실내 수영장에서 진행되었다. 정신력이 높은 때였는지, 한 달은 문제 없이 다녔는데, 갑자기 어금니의 금이 가는 바람에 발치와 치료, 여러 이유로 몇 주를 빠지고 더 이상 결제를 하지 않게 되었다. 3개월 등록하여 2개월 남짓 이용한 수영 수강이었다. 그런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추운 겨울 자전거를 타고 어둠을 헤쳐 수영장에 도착한 젊은 혈기는 지금 생각하면 짜릿하다. 귀가 시려웠지만 모자를 쓰면 시야 확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모자를 적당히 덮거나, 쓰지 않고, 페달을 밟은 5시 30분의 열정. 그건 군대에서 근무를 서기 위해 12시나 2시, 4시에 상황실로 올라갈 때, 맞았던 싸늘한 바람을 연상시켰다. 내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찬 공기를 받는 느낌은 너무 자유로워 초반에는 열심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수영장에 다녀와서 빵으로 주로 아침을 해결했는데, 호이호이 호떡이 정말 저렴했으며, 샤니에서 나온 밤만주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가끔 컵라면도 먹고, 팝콘이랑 맥주로 외로움을 달랬다. 호이호이 호떡은 지속적으로 사 먹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가격대비 포만감이 굉장히 높은 상품이다. 어렵고 힘들 시절 이런 일용할 식품이 있다는 건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신촌으로의 출근이 끝나고, 곧 구로디지털단지로의 출근이 정해졌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이다. 2달 정도인가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가끔 지하철을 이용했다. 자전거를 자동차들이 있는 곳에 묶어 놓았는데, 강제 철거하겠다는 경고를 받은 후로는 자전거가 세워진 자전거 전용 주차장(?)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도 뭔가 굉장한 서러움을 느끼며 경고 문구가 적힌 종이를 아무데나 꾸겨 버렸다. 양복을 입고 출퇴근하면서 투표기간인 동네에서 국회의원들을 원망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버스와 지하철의 붐빔을 겪는 이들에게서 우월감을 느끼면 페달을 밟았다. 크리티컬 리전인 신림을 지나 낙성대를 거치면 서울대입구로 가기전에 고시원에 도착해 신한은행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눈치가 보였지만, 신한은행 직원인척 하며 또는 고객인 척하며 비올 때 비도 피할 수 있도록 괜찮은 자리에 자전거를 세웠다. 사장 자리라며 공간을 못 쓰게 한 주차 공간에 당당하게 자물쇠를 건 적도 있다. 자동차게 주차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 자전거를 세워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무사했고, 술마시고 귀가할 때까지만 해도 잘 버텨 주었다. 어느 날 음주 라이딩(?)을 하다가 신림역 부근의 가파른 언덕에서 앞 바퀴가 심하게 마찰되면서 타이어 밖으로 튜브가 빠져 나왔다. 낭패였다. 자전거를 낙성대 부근에 걸어놓고 걸어갔다. 일이주 뒤에 자전거를 구입한 대학원 동기 부모님의 운영하는 매장에서 수리를 받았다. 장갑이랑 건전지 등을 받고, 세척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렸다. 자전거를 할인 받지 않았기 때문에 튜브 교체 등을 무료로 할 수 있었으며, 윤활제도 받을 수 있었다. 비타500도 주셨는데, 지하철역 계단에서 봉투를 뚫고 떨어지는 바람에 마시지 못한 유리병이 깨져버렸다. 자전거를 잘 이동시켜 서울대 입구로 다시 옮길 수 있었으며, 관악구청 등에 묶어 놓았다. 얼마 안 있다가 신한은행 공사로 주차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여러 이유로 관악구청 앞이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지방 출장 프로젝트가 잡히고 4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시원을 빠져나왔다. 나가기 며칠 전 고시원 총무는 입실원과 큰 다툼이 있었다. 입실원의 소란이 원인이었으며, 강압적인 총무의 명령조가 섞인 말투가 문제였다. 어떤 나이든 여성은 문을 누가 자꾼 연다고 항의 하기도 했으며, 연로하신 할아버지는 '독재'라고 외치며 자신의 자유를 억누르는 총무에게 역정을 냈다. 상스러운 욕을 하며 싸웠지만 난 이어 플러그를 끼고 나갈 날을 기다렸다.
두 번째 고시원은 잠실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총무는 서울대 입구보다 성격이 괜찮았다. 호실에 해당하는 신발장 번호에 누군가 신을 넣어놓아 다른 신발장을 쓸 수 밖에 없었지만, 16만원에 이용할 수 있었으며, 에어컨 앞의 가장 구석자리가 할당되었다. 가장 싼 방으로 책상이 없고 책장만 있는 열악한 구조였다. 천장이 대각선으로 낮아져 그 방향으로 발을 뻗을 수 있었고, TV가 놓여져 있었다. 그렇게 작은 방에서 그렇게 작은 TV를 볼 수 있다는 건 신기(?)에 가까웠으며, 머무르는 동안 TV를 몇 번 보았다. 여기서는 공유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맥북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무선 인터넷을 이용해 휴대폰의 WI-FI도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친구에게서 받은 공유기를 이용했는데,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 날 전화가 오더니 공유기 얘기로 나를 또 슬프게 하였다. 정말 돈 없으면 눈물나는 일들이 많다. 아무튼 주인한테 소심한 변명과 항의를 하긴 했지만 아쉬운 건 나이므로 저녁에 들어와서 공유기를 해체하고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총무에게 말하러 갔다. 총무와 주인의 통화를 통해 내가 공유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시킨 뒤, 허부에 내 방에 해당하는 랜선을 다시 꽂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인터넷은 가끔 잘 끊어지긴 했지만, 맥북 무선 공유로 휴대폰 WI-FI를 쓰는 일은 잦았다. 저렴한 요금제 사용을 위해서는 3G 데이터를 아껴야 했기에 필요할 때만, 이용했다. 서울대입구에서나 잠실에서나 마찬가지였는데, 통화를 할 때는 밖에 나가서 하거나 이불을 덮고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옆방의 코고는 소리 TV소리는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서울대입구에서 있을 때, 일본노래로 된 모닝콜은 살인 충동을 느끼게 한 적도 있다. 잠실에서는 다행이 맨 끝방이라 피해가 적었다. 맞은 편 방으로 총무가 가끔 와서 운동을 하자고 하며 같이 나가는 일이 있었으나 큰 피해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매우 더운 여름이라 미니 선풍기도 갖다 주었는데, 더위를 많이 타는 총무 덕분에 에어컨과 인접해있던 나는 그나마 혜택(?)을 받았다. 매우 싼 섬유 유연제를 썼는데, 향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칙칙한 고시원 냄새는 어디나 같다. 그래서 나는 섬유 탈취제를 항상 갖고 다니며 난사하는 일이 생활화 되었다. 입실자 중에는 얼린 생선을 후라이팬에 튀겨 먹는 사람이 있었는데 냄새가 많이 나서 좋지 않았는데, 퀘퀘한 냄새보다는 나았기에 이해했으며, 오히려 안타까운 생각까지 들었다. 서울대입구에서는 바퀴벌레가 있어서 약을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잠실에서도 사용하여 예방하였다. 또 다른 기억으로 김치를 후라이팬에 볶아 먹는 이가 있었다. 그 때는 그에게 삼겹살이라도 사주고 싶은 동정을 느꼈다. 그런데 내 처지를 생각하니 큰 절망감을 느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잠실에서는 두 달 입실료 지불 후, 10일 정도 더 있으면 지방으로 가는 일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10만원을 더 주고 열흘을 있었다. 돈이 좀 아깝긴 했지만, 인천에서 다니기엔 답십리가 너무 멀어 밥을 많이 먹자는 얄팍한 생각과 시간 절약이라는 생각으로 생활했다. 버스에 맛을 들이면서 버스와 지하철의 환승 편의성을 체험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여유는 그 때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
지방 출장이 끝나고, 가락동 쪽으로 성당을 다니면서 오금동에 고시원을 또 잡았다. 값을 같은데, 침대가 없었다. 뭐 전에 있던 곳도 침대라고 하기보다는 매트리스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없어 바닥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또 울컥하였다. 그래 좀 더 참아보자는 생각으로 입실했다. 보통 입실 초에는 현금으로 주는데, 나름 경력(?)이 있어 당당하게 인터넷 이체를 했다. 고시원장은 텔레뱅킹으로 입금을 확인하고 입실 증을 써줬다. 아, 정말 서럽다. 다음 날 보니 날짜도 하루가 잘 못 되어 있어 수정했다. 마지막 고시원은 엘레베이터가 있고, 샤워실도 두 개라는 메리트(?)가 있었다. 화장실은 좌변기가 아니고, 바닥에서 자야했지만 감수할 명목이 있던 것이다. 게다가 책상과 수납장의 활용도가 그나마 높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 매트리스가 없어서 그런지,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소음을 막을 수 없었다. 입실 초기에 있던 걸레(?) 같은 수건으로 문틈을 막았으며, 발소리는 이어플러그로 방어했다. 그러나 이 둘을 막을 수 없어, 겨울 잠바나 후드 짚업을 입고 귀를 막았다. '그해 겨울을 유난히 추웠다.' 매년 내가 하는 멘트이다. 항상 겨울은 시련을 맞게 된다.
오늘은 고시원 생활 마지막 날이다. 월세를 계약했기 때문이다. 참치와 라면이 하나씩 남아있다. 내일은 뭘 먹을지 좀 고민하다가 라면을 먹을 것이다. 참치캔의 휴대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김치를 하나도 먹지 않았다. 참치, 라면, 호이호이 호떡, 초콜렛, 골든볼이 일용할 양식이었다. 끼니로 이런 것을 먹으며 근근히 살아가는 자신이 비참했다. 밖에서는 5천원 이상의 식사를 하지만 혼자서는 하층민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월세로 옮기면 더 열악하게 살아야할 것이다. 대출 이자를 갚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시원에 산다는 말은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창피함은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 때나 편하게 통화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화장실에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혼자 쓰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는 씀씀이의 자유를 구속했지만, 창피해서 불편한 느낌을 조금은 해소해 줄 것이다.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불편한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창피함을 참지 못해 불편하다. 좁은 건 참을 수 있는데, 남들에게 거주지 없이 관(棺)에 산다고 말하는게 불편하다.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는 좁은 복도에서 밀착하여 길을 비키는 상황을 잘 묘사했다. 내가 있었던 고시원은 실제로 두 사람이 지나가기 어렵다. 게다가 발뒤꿈치를 들고 이동하는 배려심(?)을 보여줘야 한다. 그건 내가 쿵쿵거리는 소리를 견뎌봤기 때문에 아량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한 상황이 있겠지만, 더 이상 내려가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고시원 탐방은 마치겠다. 이제 반지하 월세로 넘어간다. 대출이자를 갚는 빈한한 생활을 통해 하우스푸어(?), 아니 그냥 가난한 채무자의 생활을 체험하러 간다. 핑크(PINK)족이라고 있다. Poor Income No Kids. 난 그냥 PINK 다. Poor Income, No Know-what(수입이나 재산이 없어, 목적의식을 갖기 어려운 상태). 아, 마지막 고시원에서는 세제가 별도였다. 갑을고시원은 휴지가 별도였는데, 참 여러가지 옵션이 존재한다. 월세방에 냉장고가 없는데 세제를 써서 세탁하려면 하나 사야할 것 같다. 잠실 고시원에 있을 때 구입한 다이소의 2000원짜리 내 양은 밥그릇이 책장 위에서 빛나고 있다.

그 밖의 참 기록할 만한 일들이 많다. 빨래를 널기 위해 빨래집게를 사용하거나 사무용 더블클립을 썼던 일, 맥가이버 칼로 벽에 나사못을 박았던 일, 마지막 고시원에서 랜선을 이용해 빨래줄을 만들었던............. 테이프를 이용해 청소하고, 샤워기를 파손시킨 일 등. 비상탈출로를 보며 화재대비책을 세우게 한 고시원에 살았던 숭고한 사람들(?, 예전에는 고시원 화재 사고가 많았다. 소설에 조금 드러나 있다.) 개인정보 수집 정책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입실원서. 내일 빠진 물건 없이 잘 챙겨야 할텐데. 일찍 일어나야겠다.

복도에서 사람을 마추지면 시선을 내리고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서로 부끄러우니까. 

대학원 동기가 이런말을 했다. 고시원에 간다니까, 그런데 가면 사람들이 손도끼를 들고 다닐 것 같다고 했나? 그는 비싼 월세를 내며 수입에 맞지 않게 살고 있었는데, 그런 서울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하우스푸어들을 양산시켰을 것이다. 지금 그는 어떻게 살까? 뭐 내 자신이나 걱정하자. 북한사람들이 뿔이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환경을 만드는 세상이 싫다. 손도끼라니.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다. 물론 코쿤족, 히끼꼬모리처럼 TV만 보는 답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열심히 살고, 상황을 진전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고시원 산다고 무시하지 마라. 허영에 찬 니들 보다 낫다!
suritam9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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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차량 운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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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구매해 운영한지 약 6개월이 지났다.

 

요즘 지방 출장을 다니면서 매일 30분 이상의 운전을 하고, 업무 장소에 가려면 4시간 정도를 운행해야 한다.

 

어제도 집으로 돌아오면서 과민 운전이나 운전 미숙으로 사고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운전이 안되는 날은 계속 문제가 생기고, 예민해 지며 사고 유발 운전 차량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이제 왕복 1회가 남아있다.

 

무사히 다녀와야할 텐데 역시 운전은 항상 무섭다.

 

[상념] 어머니와 사이다, 치킨과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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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소화 능력이 극도로 저하된다.

 

식사를 하고 나면 더부룩한 느낌과 체한 듯한 답답함에 소화제를 찾게된다.

 

어머니가 사이다를 찾았던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생활 속 스트레스도 만성 소화불량을 유발했겠지만, 노화에 의한 소화력 저하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소화가 되지 않는 나이가 되어 치킨 한 마리도 못 먹고 회식자리에서 안주를 반 이상 남기고 나와야하는 때가 되었다.

 

슬픈 일이다. 그 즐거운 추억들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치킨과 라면이 한국인과 함께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즐거운 일에 항상 빠지지 않고 힘을 주었던 치킨.

 

어려울 때나 여유가 있을 때나 찾게 되는 라면.

 

먹을게 라면 밖에 없어서 일 수도 있고 먹을만한 게 라면 밖에 없어서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치킨각, 라면인건가.

 

 

미혼에서 마흔으로

 

나훈아 노래 테스형의 테스는 소크라테스이다.

 

테스라는 소설에 나오는 테스라는 여성은 매우 불운한 삶을 살았다. 마치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 같은 시대를 

[독서] 다시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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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님을 접하게 된 것은 10여년 전 리뷰 기자 활동을 할 때 였을 것이다.

 

책모임을 같이 한 적이 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책 모임 전문(?) 활동가라는 것은 도서를 읽으며 알게되었다.

 

"나는 오늘도 책 모임에 간다" 는 올해 나온 최신간이다.

 

사지 않을 수 없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근간이 궁금할 만한 인물(?)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혼도 하고 블로그에 글도 잘 올리고 있으시고, 책도 내고 하시니 반가울 따름이다.

 

책의 유일한 단점에 대해 "너무 많다"라고 했다. 오랜만에 책에서 어록으로 챙길만한 짤고 강력한 문장을 찾았다.

 

 

요즘 이상하게 어머니와 닮은 사람을 보고, 마트에서 동명의 직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헌혈의 집에서는 나의 식사 여부를 챙겨준다. 따뜻한 헌혈의 집

[논문] 정적 사이트의 소스 저장 개념 변화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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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사이트의 소스 저장 개념 변화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Source Storage Concept in Static Sites

 

 

페이지 접속시마다 제공되는 컨텐츠가 바뀌는 것을 동적 웹페이지 또는 동적 사이트, 동일한 경로일 경우 같은 내용이 제공되는 웹페이지를 정적 웹페이지 또는 정적 사이트라고 한다. 인터넷 초반에는 정적 웹페이지를 시작으로 동적 웹페이지가 활성화 되었다가, 현재의 트랜드는 시점에 따른 유동적인 변화이다. 클라이언트 UI 언어의 발달로 정적 웹페이지가 동적으로 전환하여 서비스되는 것은 더이상 최신 기술이 아니다. 항상 동적인 웹페이지로 준비 상태일 필요가 없어진 웹사이트 운영 방식에 대한 중심 서비스인 정적 웹페이지 호스팅에 대해 과거, 현재, 향후 방향을 연구하였다.

 

[잡담] 나는 그래도 겨울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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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의 먹방, 요리방송, 영화요약, 연애상담 등의 콘텐츠를 거쳐 다 지겨워졌을 때, UI 코딩을 하다가 노래를 추가한다.

 

여름노래, 좋아하는 가수 노래가 다시 지겨워져서 겨울 노래를 찾아 듣는다.

 

벨소리 가득한 크리스마스 관련 노래를 들으며 추억을 떠올려본다.

 

올 겨울도 추울테지만, 봄을 기다리며 다시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여름이 싹쓰리와 함께 훌쩍 가버리고 지겹던 비도 그친 지금은 싸늘한 바람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상념] 가을에는 글을 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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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니 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골프장의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고, 리조트에 휴양을 즐기러 가는 사람들에게서 큰 괴리감을 느꼈다.

 

구찌, 발렌시아가, 프라다 같은 브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나의 삶의 수준을 비교할 수 없다.

 

작일의 방송인과의 식사자리는 그들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나를 철저히 깨달았다.

 

오늘은 오전, 오후 반 정도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잠으로 소일했다.

 

다음주 부터는 그리 수익적이지 않을 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일정이 겹치므로 우선순위를 수익에 맞춰 진행해야 한다.

 

가을에는 글을 쓰게 하소서

 

[글쓰기] 걱정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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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은 걱정 리스트에서 상위,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다음을 계속 꺼내서 걱정을 하는게 일이다.

 

나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 걱정이 해결 되더라도 또 다른 걱정을 하게 된다.

 

그 것을 걱정이 아닌 것을 바꾸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세상 행복하다.

 

보험회사에서 걱정 인형을 캐릭터로 광고했을 때 이해하지 못할 나이였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광고였다.

 

대신 걱정해 줄 수는 없다.

 

걱정 자체가 행동의 중심인데 그것을 빼앗을 수 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걱정은 집어 치우고 할 일 만 하면 된다.

 

그 걱정을 덜어줄 사람들은 여러 매채들로 채우면 된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그 다음은 없다.

 

애기들이 맛을 보는 만큼의 도전은 누구나 하니까.

 

맛을 본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아기들의 본능과 현재의 행동이 다르지 않다.

 

맛만 보고 결정하는 소믈리에와 다르지 않다.

 

 

[한도] 더 이상 참으면 안 된다

[원문보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의견을 계속 받아주면 수용하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어느 정도까지 수용을 해 주었으니, 이제 차단해야 한다.

 

동행하는 사람들도 고통이 전달된다.

 

다음주는 물러설 수 없다.

 

개 취급 하면 물어야지.

[자책] 나는 성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원문보기]

최근 리뷰를 하고나서, 리뷰 요청자에 대한 평가가 저조하게 나왔다.

 

리뷰 요청자도 성의 있게 제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제 달성에 대한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간(?)을 보기 위해 제출했다고 코멘트했다.

 

그런 상황에서 reject를 선택하기에는 여러모로 무언가 피드백을 줘야만 했다.

 

그러나 굉장히 친절한 설명을 하기에는 학습 자료가 충분하였고, 이를 반복해서 제공하는 것은 자원 낭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몇 줄의 글로 해당 리뷰를 끝내버렸고, 결국 리뷰 요청자와 리뷰자의 minus sum 결과를 초래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해 성의 있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성의없는 접근은 성의없는 응답을 받게 되어있다.

 

어디서부터 대충대충이 개입했을까?

 

대충대충은 아니다. 조금더 적극적이고 공통적인 기준에 달하는 노력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기 위해 준비할 때, 단순한 응답을 보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접근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되지 않은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다음 버스를 타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고 있다면 안 하는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시간도 충분하고 해야할 당위성도 충분하다.

 

결론은 성의있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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